궁금하쥬? 성문준 정 재미있겠다^^ 느릅나무 알아보고 나면 달라져요도는 알아야하는거 아닙니까@

2020. 10. 20. 20:47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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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을 씹으면 끈적끈적합니다.
줄기와 잎에서 끈끈한 즙이 나오고 코에 약이 됩니다고 코나무, 소침 같다고 소춤나무라고도 합니다.
부드러운 잎과 어린순을 따서 된장국을 끓이고, 밀가루나 쌀가루, 콩가루를 묻혀 떡도 합니다.
열매는 느릅나무 장을 담근다.
껍질은 위나 불면증 따위에 약으로 쓴다.
참느릅나무도 같은 방법으로 먹습니다.
- 나물 할 때 : 봄- 나물 하는 방법 : 잎-부드러운 잎과 순을 딴다, 열매-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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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국조(國朝)의 명족(名族)입니다.
그러나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호)을 할아버지로 두고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를 아버지로 둔 창랑공(滄浪公, 창랑은 성문준의 호)처럼 성한 이는 없습니다.
공의 휘(諱)는 문준(文濬)이요 자(字)는 중심(仲深)입니다.
공의 행의(行義)와 문장은 보통에서 훨씬 뛰어났으니, 더욱 대창(大昌)하고 확충(擴充)했어야 마땅하지만, 돌아보건대 다소 그렇지 못한 바가 있는 것은 어쩌면 두 선생의 뒤로서 아들노릇 하기와 손자노릇 하기가 어려워서 그리 된 것이나 아닐는지? 공은 선대의 법도를 근실하게 지키고 독지(篤志) 역행(力行)하여 자기 소생(所生)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두 선생께서는 참으로 아들을 잘 두고 손자를 잘 두었다 하겠다.
대체로 청송 선생은 정암(靜庵)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고제(高弟)이고 우계 선생은 그 전함을 얻었으며 또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이이(李珥))과 친우가 되었으니, 도학의 올바름은 가장 정주(程朱)의 연원(淵源)을 잘 이었다 할 것입니다.
공은 가정에서 배웠고 청송 선생도 섬겼다.
나이 10여 세 때에 율곡이 그의 시를 보고 문장재(文章才)가 있습니다 하였고 우계도 시를 지어 기쁨을 나타냈습니다.
뒤에 책을 골똘히 읽다가 병이 생기기까지 하였으나 잠시도 쉬지 않아 마침내는 백가(百家)를 두루 섭렵하게 되었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스스로 박식(博識)으로 자부하였는데, 그가 애강남부(哀江南賦,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의 유신(庾信)이 지음)에 주해(註解)한 것에 대해 공이 그 오류를 정정하였고 또 두율 주평(杜律註評)도 있었습니다.
뒤에 나라 안의 서적이 난리를 만나 불타고 유실되어 고사(故事)를 알려고 묻는 자가 있으면 공이 척척 대답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취하여 결단함에 대해 동진(東晉) 때에 조협(刁協)과 하순(賀循)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에 제수되고 또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가 되었는데, 익위사는 세자가 나가면 전도(前導)하고 강관(講官)이 회강(會講)하면 뜰 아래에 시립(侍立)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강관이 자리에 올라와 앉아서 강(講)에 참여하기를 청하였으니, 대개 공에게 경술(經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에는 군소(群小)들이 우계를 무함하니 공은 그만두고 돌아왔고 이어 광해조 16년 동안은 임천(林泉)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공은 우리 동방에서 은사(殷師, 기자(箕子)를 지칭한 말)를 숭보(崇報)함이 전연 허술합니다고 여기어 예조 판서에게 청하여 의물(儀物)을 증수(增修)하고 그 후예인 선우씨(鮮于氏)를 차출하여 대대로 그 제사를 받들게 해서 성후(聖侯)의 예로 하도록 청하여 마침내 시행이 되었다.
인조께서 즉위하자 사포서(司圃署)의 사포(司圃)에 제수하므로, 공이 품계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여 글을 올리고 사퇴하니, 임금이 윤허치 않고 이르기를, “내가 그대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입니다.
” 하였었는데, 공이 몰(歿)하자 임금께서는 또 쓰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였습니다.
나가서 영동 현감(永同縣監)을 2년을 지내고 돌아왔는데, 영동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기를, “옛사람의 유풍(遺風)이 있습니다.
”고 합니다.
천계(天啓)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 정월 26일에 68세로 졸(卒)하여 장단부(長湍府) 사당동(社堂洞)에 장사지냈습니다.
비(妣) 신씨(申氏)는 중종조의 명신인 신용개(申用漑)의 손녀이고 첨정(僉正) 신여량(申汝樑)의 따님이며, 배위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아버지가 주부(主簿) 조감(趙堪)인데, 우계 선생과 매우 친하였습니다.
아들 성역(成櫟)은 첨정이요, 성익(成杙)은 별좌(別坐)요, 성직(成)은 첨지(僉知)이며, 대사성 신민일(申敏一)과 안후지(安厚之)ㆍ윤정득(尹正得)은 그 사위입니다.
손자에 현령 성희적(成熙績)ㆍ현감 성희주(成熙胄)ㆍ성희집(成熙緝)ㆍ성희명(成熙命)과 딸로 배유화(裴幼華)ㆍ홍이원(洪爾遠)ㆍ김용서(金龍瑞)의 처는 모두 첨지 소생인데, 성희주는 첨정의 뒤를 이어 종사(宗祀)를 맡았습니다.
증손은 성지선(成至善)ㆍ성지행(成至行)ㆍ성지민(成至敏)ㆍ성지화(成至和)ㆍ성지인(成至仁)ㆍ성지중(成至重)ㆍ성지원(成至遠)ㆍ성지건(成至健)ㆍ성지수(成至粹)ㆍ성지후(成至厚)ㆍ성지헌(成至憲)이 있고 나머지는 어리다.
신 대사성의 아들 신상(申恦)과 손자 신명규(申命圭)는 모두 시종관(侍從官)이 되었고 딸로 조익(曺瀷)의 처가 된 이는 탁이(卓異)한 행실이 있었습니다.
공에게는 문집 약간 권이 있어 집에 보관되어 있고 또 태극변(太極辨)과 홍범의(洪範義)가 있습니다.
공은 훌륭한 바탕이 있을 뿐더러 가정에서 귀에 젖고 눈에 익은 바가 있으므로 실행의 독실함은 다반사(茶飯事)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문학을 더하였으므로 그 행의에 감복한 사람으로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청풍(淸風) 김권(金權),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추포(秋浦) 황신(黃愼),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등의 제공(諸公)이 있고, 월사(月沙) 이정귀(珥廷龜)와 계곡(谿谷) 장유(張維)는 또 그 글을 칭하여 근세에 없었던 바라 하였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공을 추중한 것은 사실 청송(성수침)ㆍ우계(성혼)로 인하여 더한 것이나 또한 두 선생 때문에 그 책망도 더욱 심하였으니, 만일 다른 사람이라면 그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은 일찍이 공이 음양(陰陽, 군자와 소인의 뜻)이 소장(消長)할 즈음에 처신함이 심히 분명치 못합니다고 의심하여 매우 엄하게 꾸짖었고 또 사람을 시켜 간절하게 규간(規諫)도 하였는데, 선현(先賢)의 풍기와 우의가 독실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공도 또한 감내치 못하게 여기지 않고 항상 서찰로 제공에게 손양(遜讓)을 하였는데, 그 스스로 굴함을 어렵게 여기지 않은 것도 또한 법문(法門)의 끼쳐진 법도라 할 것입니다.
그 옛날 이성보(李誠父, 주희(朱熹)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아들), 오 백풍(吳伯豊, 백풍은 오필대(吳必大)의 자(字))도 일찍이 주자(朱子)의 문하에서 의심을 받았으나 명인(名人)이 되지 못하지는 않았으니, 일시의 득실로는 천하의 선비를 단정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가 고찰하건대 우계집(牛溪集) 중에는 일찍이 공이 일을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겼으며, 그리고는 또 말하기를, “돈후(敦厚)하고 과욕(寡慾)합니다.
”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의리(義理)와 기질(氣質)의 아름다움을 알기란 가위 얻기가 어렵다 하겠다.
” 하였으며, 또 송강(松江)더러 말하기를, “효우의 행실은 내가 미치지 못할 바다.
” 하였습니다.
아! 우계 선생은 진정으로 ≪대학(大學)≫의 도리에 공을 들인 분인 만큼 감히 편벽되다고 선생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공을 아는 데에 있어서는 근접했습니다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창랑공은 부조(父祖)의 글을 읽어 효우에 독실하고 충신으로 살았으며, 시(詩)와 문(文)은 여사(餘事)였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일에 소홀합니다 하였네.
그러나 그 행실은 내가 따르지 못합니다 했으니, 그 아버지는 누구인가? 파옹(坡翁)이 아니던가? 정주(程朱)를 배우고 태극을 연구하여, 만물이 어찌 나를 속일 수 있나 하였으니, 공을 알려거든 여기에서 파악하게나.